고구려를 이끈 7대 명군들
1. 동명성왕
일명 주몽으로 널리 알려진 고구려의 시조
백제의 시조도 주몽의 아들인걸 감안하면 고대 한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한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이 양반이 도모왕이라 불리며 백제의 시조로 적혀있다
성은 해씨에서 고씨로 고쳤다 하나, 아들인 유리명왕 대부터는 다시 해(解)씨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왕계에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런데 동명성왕만이 아니라 이후 고구려 왕족의 계보도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에
해씨 고구려설이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아마 주몽의 원래 성씨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터인데
6대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를 차용하게 되면서 건국 왕의 성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혹은 해씨를 쓴 게 맞으나 원래는 방계였던 태조대왕계가 고씨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명성왕계에 대한 신성화 과정에서 동명왕이 고씨임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면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도 자연히 고씨가 되기 때문에 해씨를 성으로 썼던 역사가 묻힌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 신라도 초기 왕족보에서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당장 신라가 만든 비석에는 신라 시조는 박혁거세가 아니라 태조 성한왕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도 유사에도 없는 인물이다
당연히 해씨의 해는 현대 한국어 해(태양)와 동일어로 보고 있다 (解는 그냥 음차표기일뿐이고)
2. 태조왕
나이가 146세에 이르는 미친인물인데
유독 고구려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정도로 장수한 임금이 많다
당연히 기록의 신빈성이 의심이 안될수가 없다
심지어 5세기에 100년이란 기간동안 왕이라고는 광대토대왕,장수왕 둘 밖에 없다
태조왕이 중요한 이유는 이름에서 보다싶이
이건 건국한 군주한테나 붙히는 묘호인데 이게 시호라는건
당대 고구려인들은 태조왕을 실질적인 고구려를 나라꼴 갖춘 왕으로 보았단 의미가 된다
그리고 위에 적었듯이 해씨 고구려설과 연관이 깊은 왕이다
시호가 하나 더있는데 그 시호조차 국조왕으로 역시 나라의 시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소수림왕
여러 악재로 인해 망조가 든 고구려를 단번에 회복 시키고
지역 패권의 토대를 만든 명군으로 요약 할 수 있겠다
이 양반 없었으면 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전성기는 나올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불교가 고구려의 국교로 자리잡는다
소수림왕 들어서 갑자기 불운이 사라지고 외침이 없고 기후가 좋아졌느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고
기후적으로도 가뭄이 극심했고 외침도 잦았고 백제는 고구려를 이전까지의 호구로보고
'아따.. 나랑께, 빨리 문좀 열어보랑께'를 외치며 군사데리고 몰려오기도 했었지만 막아냈다
이런 자연기후적인 상황과 외교적인 상황 등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통치력 만으로 턴어라운드 시킨 것
요약하면 좆된 나라를 탁월한 내치로 일으킨 명군
4. 광개토대왕
우리나라 역대 부동산 재벌 2위이신 분이다 (1위는 발해선왕)
하지만 상속이 아니라 자수성가다
아쉽게도 그의 탁월한 부동산 거래 방법은 소실 됐다 (이세적 씹쌔끼야)
다만 거래내역은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8세의 급식때 즉위해 38세라는 젊은나이에 떠났다
물론 정복왕 굇수인 것은 맞지만, 고려나 조선이나 북방 이민족에게 억눌러 살고
주로 전쟁도 수비전이라 이렇다할 대확장이란 개념이 없던 시대가 천년간 이어지니 (꺽해야 국경 확장정도)
민족주의자들에게 업적에 비해 좀 과장된 정복왕으로 시체팔이당하는 불쌍한 인물이다.
뭐래드라? 동방의 알렉산더 대왕? ㅋㅋ
어느정도냐면 조선시대땐 이 양반은 그냥 평범한 고구려왕 중 한명으로 취급 받았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의 대명사중 한분이다
5. 장수왕
고구려의 황금기의 절정을 찍은 인물
깐족 거리던 백제가 겁먹어서 평소 깔보던 신라랑 120년간 나제동맹까지 체결하게 만들었다
장수왕은 대강 광개토대왕의 스탯과 소수림왕의 스탯을 반반 쓰까놓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국명을 고려로 정식으로 통일한 왕이기도하다
예로 충주고구려비에 장수왕은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 적혀있다
시호인 장수는 진짜 말그대로 오래 살아서 그렇게 붙여졌다
어느정도냐면 아들이 먼저 죽어 손자(문자명왕)가 왕위를 계승했고
이양반은 90살 넘게 살며 애비가 못해본 천수를 누리다 갔다
심지어 지극한 효자였는지 한반도와 만주 등 각지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린 비석을 곳곳에 세워
일부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고구려도 이두를 사용 했다는점과 (정확히는 이두 발달의 초기사례정도)
고구려의 1차사료가 없을때 진짜 고구려인이 남긴 고구려의 역사를 알 수 있다
6. 평원왕 바보온달의 장인이자 평강공주 애비로 유명하다 말그대로 고구려 후기 중흥의 대명사 특별히 사서에 어질다라고 나와있을 정도로 명군 내치를 보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스스로가 먹는 음식을 줄이고 농상을 장려했다 또한 선대 왕부터 축성해온 장안성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외치는 서쪽 북주의 침입을 배산의 들판에서 격퇴했는데 이 때 활약한 사람이 바보온달 평원왕 재위 말년에 이미 수문제의 위협적인 국서가 왔고 이로 말미암아 뒤의 영양왕 대에 여수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양반의 중흥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살수대첩 같은 대대적인 싸움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7. 영양왕 여수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군 이 양반 업적은 말그대로 여수전쟁 하나로 요약 할 수 있다 통일 중국 왕조를 멸망 시키는 1등 공신으로 물론 직접적으로 처들어가 때려부순건 아니고 당대 중국에서 동원할 수 잇는 인력 물자 다 끌고왔다 다 말아먹으며 그대로 하늘나라로 보내버렸다 이런거보면 중국역대 왕조는 담당 일진이 하나씩 존재한걸 알 수 있다 한나라-흉노, 수나라-한국, 당나라-티벳, 송나라-몽골, 명나라-만주, 청나라-구미열강, 중화민국-일제, 현재-미국 특히 여수전쟁 규모가 어느정도냐면 현재에도 여수전쟁보다 규모가 큰 1:1 단일전쟁은 없으며 여수전쟁을 능가하는 전쟁은 1차 세계대전으로 말그대로 근대시대에 와서 수십개국이 참전하면서 갱신됐다 내치로는 신집10권 편찬을 뽑을 수 있겠다 당대 고구려의 기록은 유기 100권이라 불리는 사서가 있었다 물론 유기가 책이 아니라 목각같은데다 역사나 설화같은걸 적은거라는 주장도 있다 이걸 함축해서 10권 분량으로 줄인게 바로 신집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 소수림왕대까진 이 신집이나 신집의 원본자료를 참고해 만든거 같은데 문제는 이후부터는 기록이 급감하며 중국 기록을 컨트롤 c+v한 티가 그대로 난다 대표적으로 연개소문이 피휘당해 천개소문으로 적힌거 (이 사실은 조선시대때 밝혀진다) 신집이 싹 날아간건 당나라가 평양을 함락했을때 이세적 씹쌔끼가 소국주제에 책이 많다고 싸그리 불태워버렸다 시발련 (+안학궁도 같이 태워버림 시발련) 그래서 초중기땐 졸본-국내성이 수도라 초기 기록은 어느정도 건질 수 있던걸로 보이며 후기, 장수왕의 평양천도때 이후 기록은 중국 사서를 컨트롤 c+v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만 초기 기록이 풍부하고 후기 기록이 딸리는 역주행을 한다 백제나 신라는 후기로 갈수록 기록이 풍부해지는 전형적인 고대국가의 모습을 띄는데 3줄 요약 고구려의 7대 명군을 뽑는다면 주몽,태조왕,소수림왕,광개토대왕,장수왕,평원왕,영영왕을 뽑을 수 있겠다 자세한 내용은 글 읽어라 다음은 백제의 명군을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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